인물

김달진 시인은 1907년 2월 4일 경남 창원군(현재의 진해시 소사동)에서 태어나 1920년 계광보통학교를 마친 뒤, 서울과 향리에서 수학하다 출가하여, 1934년 금강산 유점사에서 득도하였고 1939년 현 동국대학교 전신인 중앙불교전문학교를 졸업하였다. 1929년 『문예공론』에<잡영수곡>을 발표하여 문단활동을 시작했다. 1936년 서정주, 오장환 등과 함께 <시인부락>동인으로 활동하였으며 1940년 첫 시집 『청시』와 1983년 시전집 1『올빼미의 노래』를 포함하여 시인이 남긴 방대한 저술은 1997년부터 『김달진 전집』열 아홉권에 담겨져 내려오고 있다. 무욕과 탈속의 경지에 다다른 시인이며, 자유자재한 고승이었을 뿐 아니라 향리의 존경받는 교육자였던 시인은 1989년6월7일 향년 82세로 세상을 떠났다.

1990년부터<김달진 문학상> 이 수여되고 있으며 1996년부터는 <김달진 문학제>가 진해시에서 개최되어 시인의 문학과 삶을 기리고 있다.

저서로는『장자』『법구경』『한산시』『당시전서』등과 역서로는 『한국선서』『붓다 차리타』『보조국사전서』등이 있다.

개통학교와 오산중학교를 졸업하고 연희전문학교에 진학하였으나 안질로 중퇴를 했다. 열세살 때부터 웅천교회에 나가서 신앙생활을 시작하여 1920년 김두익 목사의 설교에 감동하여 목사가 될 결심을 하고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1925년에 졸업하였다. 

1925년 부산초량교회에서 시무를 하다가 다음해에 목사가 되었다.

1929년 기독교인에 대한 일제의 신사 참배 요구를 거부하는 제안을 경상남도 노회에 제출하여 항일투쟁이 시작되었다.

1931년 마산 문창교회 목사로 부임, 1935년 평양신학교 부흥회에서 유명한 "일사각오"(예수를 위하여, 남을 위하여, 부활 진리를 위하여)란 설교로 교수와 학생들에게 큰 감동을 주자 일본경찰은 이 내용을 발표 못하게 탄압을 하였다.

1936년 평양 산정교회 목사로 전임.

1938년 2월. 평안북도 노회에서 신사참배를 가결하여 이에 학생들이 반항하자 학생들을 선동하였다하여 구속당했다.

1939년 2월. 풀려나 평양에 돌아와서 2천여명이 모인 자리에서 일경이 지켜보는 가운데 유명한 '다섯 종목의 나의 기도'란 설교를 하였다
 주목사가 평양에서 돌아와 다시 신앙의 불길이 일자 예비검속을 당하여 9개월간 옥고를 치뤘다.

1944년 4월, 가석방이 되어 돌아와 보니 산정현 교회의 문은 횡십자 판자로 못이 박혀 있었다. 다시 신앙의 불길이 일어날 것을 막는 일제의 탄압이었다. 교회를 잃자 신도들은 주 목사의 집으로 몰려왔다. 당황한 일경은 한달이 지나 다시 구속을 했다. 그로부터 5년 4개월의 옥고를 치르면서도 변함없는 항일 신앙 태도에 옥의로 하여금 살인 주사를 놓게하니 48세를 일기로 비명에 가고 말았다. 

1963년 3월 1일에 건국공로훈장이 추서되고 1968년에 국립묘지로 이장하였다. 

자는 우원, 호는 석천으로 서당에서 수학하였으며 1902년에 웅천군의 판임주사로 서임되었다. 관리생활을 하면서 국내의 정세를 살펴보니 청일전쟁에서 이긴 일제가 러시아와의 전쟁에서도 승리하고, 한국의 침략이 노골화되어 구국의 길을 교육과 산업 진흥에 두어야겠다고 결심하고 관직을 그만두고 상경하여 선각자들을 방문하였다.

1906년 사재를 들여 웅천에 사립 개통학교(웅천초등학교 전신)를 창설하였고, 1907년 숙명의숙을 세웠다. 졸업생중 유망한 제자 40여명을 선발하여 사재로 유학을 시켜 민족지사의 양성에도 힘쓰니 가산이 기울어졌다.

1914년 민족교육기관인 개통학교에 탄압이 가중되자 상무조합에 운영을 위임하고 실업진흥에 전념하였다. 

1917년 개통학교가 공립학교로 전환되면서 숙명의숙도 통합되었다.
실업조합, 홍업조합을 발기하고 '국채보상단연동맹'을 조직하여 일제의 경제적 침략에 대항하는 운동을 벌였으며 말년에는 밀양시 하남면 수산리로 이사를 하여 광복의 날만 기다리다 못보고 타계하였다. 

1916년. 오산중학교를 졸업하고 신자균과 같이 사립 계광학교 교사가 되었다.
계광학교에는 이 밖에 배재황, 허전 등이 교사로 근무하고 있었다. 이들은 교사이자 민족지사로서 조국애를 심고, 민족의 혼을 불어넣는 애국애족 교육을 하였다.

1919년. 위의 선생님들은 웅동지역 삼일운동의 주역이 되었다. 다른 교사들은 시위를 한 후 피신을 할 수 있었으나 주기용은 주동자로 체포되어 1년 6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형기를 마치고 오산중학교 설립자인 이승훈의 도움을 받아 일본에 유학하여 동경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1927년에 돌아와 오산중학교의 교사로 부임하였고, 1933년에는 교장으로 승진하였다. 

철저한 민족교육을 하던 오산학교에도 일제의 압력이 미쳐 1943년 일본인 교장이 취임하자 광복될때까지 농장을 경영하였다.

광복 후 교장으로 복직하였으나 공산치하에 불만을 품고 월남하여 과도정부의 문교부 보통교육국장, 제헌국회의원, 부산에 오산중학교를 재건하여 교장, 이사장 등을 역임하고 타계하였다. 

웅천개통학교를 졸업. 1919년 웅천의 기미독립만세 시위의 주동자의 한사람으로 옥고를 치르고 일본에 유학을 하여 와세다대학 전문부정경과를 졸업하였다. 재학 중 동경유학생 회장을 역임하고, 졸업 후 재일 한국노동자의 권익 옹호 운동을 하였다. 

그 뒤로 일경의 감시가 따랐고 귀향할 때도 미행을 하였다. 일본 교오토 웅천향우회장을 맡고 웅천 출신의 어려운 재일 교포를 돕는 일도 하였다. 

1928년 고향에 돌아와 조성복, 김창업 등과 같이 민족 청년 운동을 하여 청년회관도 건립했다. 여러 차례의 감옥생활로 건강이 나빠지더니 마산형무소에 수감 중 극도로 병약해져 보석이 되었으나 40세를 일기로 타계하였다.  

자는 의국, 서당과 향교에서 수학하였다.

1904년, 웅천현의 향장이 되었다. 그는 일제의 침략을 막는 길은 민족의 저력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스스로 상투를 자르고 현대 학문을 닦고 생활방식을 현대화하였다. 그리고 세계의 조류에 뒤떨어지지 않으려고 서구문명인 기독교를 받아들이는 것이 지름길이 된다고 생각하여 '마천교회' 설립에 앞장섰다. 
1907년 봄 일제가 우리 농토를 군용지로 약탈하면서 매입한다고 구실을 붙여 덕산동에서 땅값의 수령거부 투쟁을 하여 구속을 당했다.

1910년 일제 해군이 관남리 등 4개 마을의 주민을 몰아내고 웅동수원지의 축조 공사를 시작할 때 저항을 하면서 지주들에게 땅값을 받지 못하도록 절규를 하다가 일본해군들에게 연행되었다. 함정으로 끌려가서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풀려났을 때는 기진하여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였다. 항일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항일 투쟁만 하던 그는 그 길로 34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하고 말았다.

그가 설립한 창동학숙이 사립계광학교로 발전한 후 그의 사진을 이병두와 같이 교무실에 걸어두고 추모하였다.  

개통학교와 계광학교 고등과를 수료하고 상경하여 경성청년학교 중학과를 졸업하였으며, 주시경의 한글학교에서 국어학을 연구하여 19세때 계광학교 교사로 부임하였다. 

1919년 기미독립만세 시위가 일어나자 서울에서 등사기를 구입하여 승복차림으로 혹은 노동자 차림으로 위장을 하고 김해를 거쳐 굴암산을 넘어와 죽벽 마을에서 주기용, 허전 등과 같이 태극기를 만들며 웅동에서 기미 만세 시위를 준비하였다. 웅동의 기미만세 시위에 이어 조직적 투쟁을 하려고 구속을 피했으나 건강이 나빠 활동력을 잃고 한동안 유유전전 하였다.

1934년 김해군 진영면으로 이주를 하여 영농을 하면서 일본인 지주와의 소작쟁의, 농민조합 설립 등 농민운동을 벌였다.
광복을 맞이하여 진영에서 한글강습소를 열고 건국준비위원회 임원, 미 소공동위원회에 경남 단체 대표로 참가하는 등 활동하였으나 좌경인사로 오해를 받아 사회 활동을 포기하고 부산으로 이주하여 힘든 여생을 보냈다. 

1915년, 석동에서 배정만의 차남으로 태어났으며, 가정이 어려워 고학을 하려고 1931년에 일본으로 건너갔다. 

1938년 7월 하순경, 호쿠신상업학교 재학생 중 민족의식이 강렬한 최창현과 조정규를 학교 근처 노상에서 만나 호쿠신상업학교에 재학중인 한국학생으로 유학생회를 조직하여 한국 학생과 한국인들에게 독립의식을 고취하기로 찬의를 받았고, 이해 10월 초순경 재학생 문규영을 또 만나 합의를 하였다.

이해 10월 초순 어느날, 그의 형집에 호쿠신상업학교 한국 학생 14명을 '친목다과회'라는 명목으로 모아 '호쿠신상업학교 유학생회'를 조직하고 스스로 회장이 되어 조국의 독립을 위해 궐기하자는 일장 연설을 하고 조선독립만세를 3창했다.

이러한 활동으로 배상권 외 주동자들이 소위 치안 유지법 위반으로 차례차례 체포되어 1941년 12월 16일에 고오베 지방재판소에서 배상권은 징역 3년, 조정규, 최창현, 문규영은 징역 2년에 4년 집행유예가 언도되었다.

1942년 6월 16일. 고문과 옥고의 여독으로 빈사상태가 되어 석방된 배상권은 일경의 방해로 치료 한번 해 보지 못하고 다음날 27세라는 꽃다운 나이로 운명하고 말았다.

1993년 4월 13일, 독립유공자로서 포상(건국훈장 애국장 제1951호)을 받았다. 

1913년 경화동에서 대서업을 개업, 1915년 우리고장에서 처음으로 민족운동을 하는 청년회를 결성했다.

1916년 사립대정학교의 운영을 지원하는 진해장학회의 회장이 되고 뒤에 생도보호회장도 되어 일제의 민족차별 교육정책 아래에서도 우리고장의 후진들이 초등교육을 받을 수 있게 야학교를 설립하였다. 
1920년. 삼일운동 후 창간된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의 지국을 경영하여 언론을 통한 민족의식 고취에 노력하였다.

1923년 동지들을 규합하여 소작회를 창립하여 일본인과 소작쟁의에 들어갔다. 소작회를 조직한 후 간악한 일본인과 그를 비호하는 일본관헌과의 투쟁에는 목숨을 아끼지 않았다. 

1927년. 소작쟁의를 하고 있는 와중에도 민족운동가의 결속체인 '신간회'가 결성되자 창원군 지부를 결성하여 지회장을 맡았다.

1931년 마산에서 회의를 마친 귀로에 급성맹장염으로 당시로서는 가장 시설이 좋았던 해군병원에 입원하여 수술을 받았다. 수술을 한 군의관이 격렬한 항일 투쟁을 하는 민족운동가임을 연락받고 치료를 소홀히 하여 41세를 일기로 비명에 가고 말았다. 

1995년 8월 15일 광복 50주년을 맞이하여 독립유공자로서 포상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