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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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해는 해군의 요람으로 36만여 벚꽃이 만개하는 봄에는 군항제가 개최되는 아름다운 고장입니다.
흔히 진해하면 일제 강점기 때 일본해군 군항과 그 배후도시 건설로 탄생한 고장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는 서부지역 일부분의 역사이고 진해 중부와 동부지역은 조선시대 남해안의 중심역할을 한 다양한 
 역사의 자랑스러운 고장입니다.
단군이 나라를 세웠던 4000여 년 전에 이 고장에도 사람이 살기 시작하였는데 이를 증명하는 9개의 패총과 다양한 주거유적, 고분유적이 발견되었습니다. 48년 가락국 김수로왕의 왕비 허황옥이 사촌오빠 장유화상과 함께 인도 아유타국으로부터 도착한 곳이 용원지역으로 불교의 최초 도래지입니다.
고려 말 우왕은 고산성을 축성하였으며, 태조 이성계가 경상우수영을 제포에 두었고 세종은 최대 무역항으로 역시 제포항을 개항 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우리 고장의 중요성을 인식한 세종대왕은 황희정승 등의 건의를 받아 왕명으로 웅천읍성을 축성하여 왜구들의 침략에 대비하였습니다.제포에 무역항이 개항되자 불법체류 왜인들이 2500여명에 달했는데 이들과 대마도 왜구들이 합세하여 일으킨 삼포왜란의 중심지가 제포이며 왜란을 진압한 중종에 의해 우리 고장은 웅천도호부로 승격되기도 하였습니다. 우리 고장은 조선시대 무역과 군사적인 면에서 남해안의 중심 역할을 한 자랑스러운 고장입니다. 임진왜란 때에는 이충무공의 15번 해전 중 9번의 승전을 진해만 일대에서 거두었고 그 중 합포, 안골포, 웅포 등 3번의 승전을 진해땅에서 이루었습니다.
일본과 가까운 지정학적인 이유로 일본과 관계되는 문화유산이 많은 것이 우리 고장의 특징입니다.
일본인이 가장 아끼는 국보 26호 ‘기자에몬 이도’도 웅천도요지에서 만들어져 일본으로 건너갔으며 우리나라에 최초로 상륙한 서양인도 임진왜란 때 입국한 스페인 마드리드시장의 아들이였던 쎄스베데스 신부이며 이는 제주도에 상륙한 하멜보다도 60년 전 일입니다.불교에 이어 천주교의 최초 전래지도 우리 고장입니다.
진해에는 모두 10개의 성이 축성되었는데 우리 조상들에 의해 축성된 성이 7개이고 왜성이 3개입니다.
조선시대 문종 이후 우리 고장의 지명은 웅천현이었고 지금의 웅천지역이 중심지였으나 한일강점기 후 일본 사람들에 의해 지금의 서진해 지역이 군항과 배후도시로 개발되어 새로운 중심지가 되면서 진해면이라는 이름이 등장하였습니다. 
이 때 강제 추방당한 11개 마을 조상들이 이주단지로 조성된 곳이 경화동이며, 웅천과 웅동이 잠시 진해와 분리되어 창원에 속하기도 하였습니다.
일본사람들에 의해 신시가지가 조성되면서 3개의 방사직교형 로타리가 만들어졌는데 순수한 도시계획 목적 에 일본의 군항에 욱일기를 형상화한 주제가 숨어 있다고도 전해옵니다.

1. 선사시대
선사시대는 문자의 기록이 없어 유적과 유물로 인류의 역사를 가름하는데 안골동 패총에서 채집된 유물등을 분석한 결과 적어도 신석기시대 후기인 약 4000년 이전에 우리 고장에도 인류가 생활하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2. 가야, 신라시대
웅천패총과 고분군,자은동패총 석동고분군의 유적을 분석한 결과 가야시대 우리 고장에도 소규모 정치체계가 존재하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신라에 병합되어 웅지현으로 개편된다(웅천 고산성. 자은동 구산성 축성)
3. 통일신라시대
757년(경덕왕16년) 현 웅천지역은 웅지현에서 웅신현으로, 서진해 지역인 완포향(행암동에서 창원의 삼귀동,신촌동,웅남동,)이 속한 골포현은 합포현으로 웅동지역은 천읍부곡으로 개칭하여 의안군 영현으로 개편
4. 고려시대
- 1018년(현종 9년) 웅신현과 완포향이 금주(김해)의 속현으로 개편
- 고려 연대미상 완포향이 완포현으로 올려져 금주에 속함
- 1384년(우왕10년) 완포현의 고산에 성곽 축조
- 1390년(공양왕2년) 내이포(제포)에 수군만호진을 둠
5. 조선시대
- 1398년(태조 7년) 내이포(제포)만호를 도만호(경상우수영)로 승격
- 1407년(태종 7년) 내이포(제포)와 부산포를 왜국에 개항하여 왜선의 정박을 허가
- 1419년(세종1년) 대마도를 정벌하고 왜와 단교하면서 우수영을 오아포로 이설하고 내이포는 만호로 강등
- 1423년(세종 5년) 내이포(제포)와 부산포를 다시 개항
- 1426년(세종 8년) 염포(울산)를 추가로 개항하여 삼포가 대왜 무역 담당
- 1434년(세종 16년) 웅천읍성 축성
- 1436년(세종 18년) 내이포(제포)만호를 경상우도 도만호로 다시 올림
- 1443년(세종25년) 계해조약으로 삼포에 한하여 왜인의 거주(제포 30명)를 허락하고 무역선은 한해 50척 이내로 제한하며 구호미는 200석으로 하고 출입시에는 증명서를 지니도록 조처
- 1452년(문종2년) 완포현(지금의서진해), 웅신현(지금의웅천), 천읍부곡(지금의 웅동)을 통폐합하여 웅천현으로 개편하고 김해도호부에서 분리함
- 1453년(단조1년) 웅천읍성을 증축하고 해자를 보강함
- 1456년(세조1년) 제덕토성 축성 
- 1485년(성종16년) 제포진성 축성(1486년 완성)
- 1490년(성종21년) 안골포진성 축성
- 1510년(중종5년) 제포의 왜인들이 대마도 왜인과 합세하여 삼포왜란을 일으켜 제포진성과 웅천읍성 함락, 진압 후 제포왜관을 폐쇄하고 왜와의 교역을 단절함. 웅천현을 웅천도호부로 올려 제포로 옮기고 제포첨사는 영등포로 이설
- 1512년(중종 7년) 웅천도호부를 웅천현으로 복원시켜 웅천웅천으로 옮김
임신조약으로 왜인의 거주는 불허하고 무역선을 25척으로 감하고 구호미는 100석으로 줄여 제포 재 개항
- 1541년(중종36년) 제포의 왜인들이 수비병을사상하는 난동을 일으킴
- 1544년(중종 39년) 경상우수영을 가덕도로 이설하고 제포는 만호진으로 강등. 왜관을 
부산포로 옮기고 제포를 폐항함
- 1592년(선조25년) 임진왜란 발발, 왜 육군 3진이 안골포 상륙 후 북상. 합포해전과 안골포해전 승전 
- 1593년(선조 26년) 웅포해전 승전 
왜군이 웅천남산, 안골포 동망산, 명동 사화랑산에 각각 왜성 축성
쎄스뻬데스 신부가 입국(12월27일)하여 웅천왜성에서 1년여 선교
- 1595년(선조 28년) 웅천도요지 도공 125명이 왜장 마쓰라 시계노브에게 끌려가 폐요 됨
- 1895년(고종 32년) 웅천현이 진주부 관하의 웅천군으로 개편
- 1896년(고종 33년) 경상남도 웅천군으로 개편
6. 대한제국과 한일 강점기 시대
- 1904년 1. 12 거제도 송진포에 일제가 해군방비대를 설치/12.15 진해만방비대로 개칭
- 1905년 2-5.27 일본 해군 진해만일대에서 해상훈련
- 1905년 5.28-29 대마도해전 승리(러일전쟁 승리)
- 1905년 7 테프트 가쓰라 밀약으로 한반도 지배 인정(필리핀 미국) 
- 1905년 10. 13 가덕도 외양포에 일제가 진해만 요새사령부와 포병대 설치

(1909년 마산으로 이전 / 1914.12,9 육대부지로 이전)
일본해군 도만이들을 측량하다 주민들에게 쫓겨남
- 1906년 덕산동 사립경명학교, 성내동에 사립 개통학교 개교
- 1906년 8. 27 조선정부의 관보로 진해를 일본해군 군항예정지로 고시
일본해군 도만이들에서 주민들 저항을 막으며 측량 강행
- 1908년 웅천군이 창원부에 통폐합되어 창원군의 관할구역으로 변경
웅동수원지 공사 시작
- 1910년 4 일제가 군항공사 시작(현동에 임시해군 건축지부 청사개청)
- 1910년 창원부가 마산부로 개편되어 마산부의 관할구역으로 변경
군항배후 시가지 공사시작(12만평/ 인구5만 목표/ 800만원)
서쪽 현동등 9개마을 동쪽 중동등 2개마을 주민들 한일거리로 강제이주
- 1910년 9 현동 우편소 개소
- 1911년 1.1 칙령 452호로 일본 제 5해군구 군항확정
칙령 453호로 진해군항지역 확정(웅중면-웅서면 알부) 
- 1912년 웅중면과 웅서면 일부를 진해면으로 개편(초대면장 어찬우)
- 1912년 2 진해군항부 병원 개소
- 1912년 4.18 일제가 거제 송진포의 진해만 방비대를 진해로 이전
경화동에 사립 대정학교, 마천동에 창동학숙(계광학교 전신) 개교
- 1912년 10 진해 우편국 개소
석동농민들 경남 최초의 일본인 추방궐기대회 개최(돌리 헛난리)
- 1913년 10 진해심상 고등소학교 개교
- 1914년 창원군이 마산부에서 분치되어 창원군 관할로 변경
일본 제5해군 진수부사령부 완공
- 1914년 12 진해만 요새사령부가 마산에서 구 육대부지로 이전
- 1915년 주병화 등이 진해청년단을 조직하여 민족 청년운동 전개
- 1916년 일본 제 5해군구 군항에서 요항부로 격하(1차세계대 후 군비축소 영향)
- 1917년 진해면이 지정면이 되어 일본인 면장을 둠
- 1919년 웅천면, 웅동면 독립만세 시위(35명 체포, 15명 투옥)
- 1922년 진해군항 건설완료
- 1924년 4.1 칙령 58호로 제3해군구 군항의 진해요항으로 개칭
- 1926년 진해선 개통(진해역 10월 준공 / 정식 개통식 1927. 4)
- 1929년 진해양어장 완공
- 1929년 5. 27 러일전쟁 승전 기념탑 준공
- 1931년 진해면이 진해읍으로 승격
- 1936년 10.1 진해 해군항공대 창설(현 해군사관학교)
- 1941년 진해 요항부(중장)가 진해 경비부(대장)로 개편
- 1942년 8. 진해 해군 항공창 창설(덕산 비행장)
7. 광복후
- 1945년 해방병단(조선해안 경비대 전신) 창설
- 1946년 1 해군병학교(해군사관학교 전신)개교
- 1946년 9 조선해안 경비대 특설기지 
- 1948년 11.11 국군으로 개편됨에 따라 해안경비대가 해군으로 개칭
- 1949년 4 한국해병대 창군(덕산동)
- 1951년 4 공군사관학교 진해로 이전
- 1951년 2 정규 4년제 육군사관학교 개교(1954년 태릉으로 이전)
- 1952년 4.13 충무공 이순신장군 동상 제막
- 1955년 진해읍이 진해시로 승격(웅천면, 웅동면, 천가면은 창원군에 속함)
- 1963년 제1회 군항제 개최
- 1973년 창원군 웅천면이 진해시에 편입
- 1975년 거제군 저도와 망와도가 진해시에 편입(1993년 다시 환원)
- 1983년 의창군 웅동면이 진해시로 편입되어 옛 웅천현의 고토회복(가덕도제외)
- 2010년 7.1 창원 마산 진해 창원시로 통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