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웅천읍성은 평지성, 석성으로 조선시대 왜구의 침입을 방어하고 주민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세종16년(1434년)에 축성을 시작하여 3년 후 완성하였다. 『세종실록』에 따르면 세종 16년에 김해읍성과 웅천읍성 축성을 논의하여 같이 축성하기로 결정하였다. 세종 17년(1435년)에는 웅천읍성이 완공되지 않아 각 포진의 수군을 동원하여 완공하도록 기록하고 있는데 성의 기단부에 진주 창녕 등 할당 구역을 알 수 있는 기록이 새겨져 있다. 그 후 단종 1년(1453년)에는 체성을 증축하고 성 밖에 해자를 조성하였다. 그리고 세조 3년(1457년) 삼도의 도순찰사 박강이 웅천읍성이 협소하여 서쪽에 다시 증축할 것을 건의하여 이를 시행하였으며 그 뒤 중종 36년(1541년)에는 성을 다시 증축하고 성 밖에 민가 300여 호를 성안으로 옮기는 논의가 있었다. 
웅천읍성은 장방형 석축성으로 기단부를 이중으로 조성하고 자연대석 (1.8m×1.2m×1.5m규모)을 사용하여 수직으로 쌓아 올렸다. 또한 동서남북의 정방에 옹성형 문지를 두었으며 각 문지의 좌우와 성곽의 네 모퉁이에 곡성과 적대를 둔 전형적인 읍성형태의 성이다. 길이 936m, 폭 2.5m, 높이 4.4m로 동벽은 대체로 온전히 남아 있으나 남벽 및 서벽은 대부분 훼손되어 일부만 남아있고 북벽은 한일합방 후 일본사람들이 국도를 내면서 파괴하여 기단부만 매몰되어 있다. 웅천읍성이 현성으로서의 행정적인 기능을 한 것은 문종 2년(1452년) 웅신현과 완포현 그리고 천읍부곡을 합하여 웅천현으로 승격된 이후부터이다. 공해는 동헌, 객사, 장적고, 향사당, 인리청, 군관청, 장관청, 훈도청, 지인방, 사령방등이 있었으며 문루는 동문의 견룡루, 서문의 수호루, 남문의 진남루, 객사문루인 정해루 등이 있었으나 지금은 흔적조차 없다. 특히 객사는 초등학교 건물로 계속 사용되었으나 1967년 철거되고 그 자리에 웅천초등학교 건물이 신축되었다. 
현재는 동문과 동문벽 등 일부만 복원하였다.


웅천도요지는 조선시대 분청사기를 생산하던 곳으로 보배산(보개산) 기슭의 점골에 위치하고 있다. 일본국보 26호 이도다완의 생산지로 두동요지, 금곡요지 등으로도 알려져 있다. 
가마터에서 채집되는 유물은 귀얄문과 덤벙문 분청사기이며 가마터는 도굴로 상당히 파괴되었다. 분청사기는 14세기 중엽부터 나타나기 시작하여 15세기 초에는 다양한 기법으로 발전하여 전성기를 맞지만 16세기 중엽부터 자취를 감추게 된다. 한국인의 소박한 감정을 가장 꾸밈없이 보여주는 그릇으로, 회색 또는 회흑색의 태토위에 정선된 백토로 표면을 분장한 뒤에 유약을 씌워 환원염에서 구웠다. 이곳 웅천도요지는 15세기 후반부터 16세기 중엽까지 가마가 운영되었으나 임진왜란 당시 도공들이 모두 일본으로 끌려가면서 폐요가 되었다. 

북부동 관정마을에서 백일마을로 오르는 왼편의 빙고등에 조선시대에 축조하여 자연빙을 저장하였던 빙고지가 있는데 반구암 빙고라고도 한다.
웅천빙고지는 입구와 지붕이 무너져 내리고 매몰되어 현재 완전한 현상을 파악할 수 없다. 산허리를 타고 남북으로 뻗은 장방형으로 내벽은 90cm×30cm 정도의 돌로 석축 하였으나 북벽은 무너져 내렸고 나머지는 매몰되어 확인이 불가능하다. 빙실의 규모는 깊이 3m,폭 6m, 길이 16m로 추정된다. 
 

성흥사는 대한불교 조계종의 제14교구 범어사의 말사이다. 신라시대 무염국사(801-888)가 웅동 지방에 침입한 왜구를 불력으로 물리친 것을 흥덕왕이 보은하는 뜻으로 구천동에 지었다고 전해오는데 한때는 스님이 500여 명이나 되는 큰 사찰이었다고 한다. 그 뒤 잦은 화재로 몇 차례 이건하였는데 창건한지 276년 만에 대장동으로 옮겼고, 다시 322년에는 원래의 구천동으로 옮겼다. 그리고 현종 8년(1667년) 대장동으로, 숙종 39년(1713년)에도 자리를 옮겼는데 정조 13년(1789년)에 비로소 지금의 위치에 이건 하였다고 한다. 
무염국사는 신라의 승려로 무열왕의 8대손인데 당나라에 유학하여 명승고적을 주유하면서 이름이 널리 알려져 동방대보살이라 불렸다. 귀국한 뒤에는 충남 보령의 오합사에 있으면서 성주산문의 개조가 되었는데 무염국사가 창건한 사찰들의 이름에 대부분 성 자가 붙는 것도 그 때문이다. 대웅전은 창건 년대를 정확히 알 수 없으나 현재의 건물은 조선후기에 다시 지었을 것으로 보인다. 잡석으로 기단을 조성하여 자연석의 주춧돌을 놓아 둥근기둥을 세웠으며, 기둥머리에는 창방을 받치고 그 위에 다시 평방을 걸어서 기둥 사이에도 공포를 1구씩 더 짜 올린 다포식 맞배지붕의 건물이다. 또한 공포의 실미 끝 부분에는 연꽃 장식을 첨가하고 닭 등 동물 모양의 장식이 나타나는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된 건물로 조선시대 후기 사찰 건축의 양식적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
성흥사에는 고종 27년(1890년) 화주스님이 그린 섬세한 필치의 무염국사의 영정과 대불상, 나한상, 나한종관상, 제석상 등과 당간지주가 있고 사찰의 남서쪽 200m 지점에는 조선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부도 군이 있다. 

가락국의 시조 김수로왕의 왕비 허황옥이 인도 아유타국으로부터 도래한 유적이다.
가락국기의 내용을 보면, 건무 24년(서기48년) 7월 27일에 구간(九干)등이 아뢰기를 ‘대왕께서 강림하신 이래로 좋은 배필을 얻지 못하시었으니 신 등이 둔 처녀 중에서 절묘한 자를 궁중에 뽑아 들여 배필을 삼으소서’라고 하니 왕께서 이르기를 ‘내가 여기 내려온 것은 하늘의 뜻이요, 나의 배필로 왕비가 되는 것 또한 하늘의 뜻이니 그대들은 염려하지 말라’ 이르더니 어느 날 유천간에게 명하여 망산도에 가서 기다리게 하는 한편 신귀간에게 명하여 승점으로 가게 하였다. 홀연히 바다 서남쪽에서 붉은 색의 돛을 달고 붉은 기를 휘날리며 북쪽을 향해서 오는 배가 있었다. 유천간 등이 먼저 망산도에서 횃불을 드니 앞을 다투어 상륙하였다. 신귀가 대궐로 달려와서 왕께 아뢰니 왕이 듣고 기뻐하였다. 삼국유사의 기록에 근거하여 말무섬을 유천간이 기다린 망산도로, 쪽박섬을 공주가 타고 온 돌배가 돌아가다 뒤집힌 유주암으로, 또 나중에 김해 허씨 문중에서 공주가 도래한 부인당에 세운 비가 유주비각이다. 유주비각은 융희 2년(1908년)에 정면 1간, 측면1간의 맞배지붕 목조와가로 건축하였다. 비각 안의 유주비는 높이 1.75m, 폭 0.765m, 두께 0.35m의 석비로<대 가락국 태조 왕비 부주 태후 허씨 유주지지>라 새겼다.
2006년 행정구역 조정으로 망산도와 유주암은 부산시로 이관되었다.

봉수는 횃불과 연기로 변방의 긴급한 정황을 중앙이나 진영에 알리던 통신제도로서 군사적인 목적으로 설치된 시기는 고려 중기인 12-13세기경으로 보고 있다. 
봉수제는 4거화, 2거화를 거쳐 5거화로 정착했는데 경국대전에 따르면 평상시에는 일거, 적이 나타나면 이거, 경계에 접근하면 삼거, 경계에 침범하면 사거, 접전하면 오거를 올리되 경성에서는 병조에, 지방에서는 진장에게 보고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주요 봉수로는 직봉이라 하여 제1거는 경흥, 제2거는 동래, 제3거는 강계, 제4거는 의주, 제5거는 순천에서 순차적으로 한성의 목멱산에 위치한 중앙봉수에 집결되도록 하였으며 사이사이에 간봉을 두었는데 우리 고장의 봉수는 간봉으로 사화랑 봉수, 장복산 봉수, 고산 봉수가 있었다.
사화랑 봉수는 경상도방면에서 서울의 목멱산에 이르는 제2거의 간봉이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연해와 변경의 봉화대에는 봉화대 근처의 거주인으로 군사 10인과 오장 2인을 임명하여 배치하였다.
웅천읍지와 동국여지지에 따르면 사화랑 봉수의 군보는 100명(군 25인, 보 75인)이었다. 명동 뒷산인 사화랑산의 정상에 설치되어있었으며 가덕도 천성연대봉수의 신호를 받아서 서쪽 창원 여음포봉수와 장복산봉수로 알렸다. 고종 31년(1894년) 8로의 봉수가 폐지될 때 함께 폐지되었다.

청룡대는 부산과 경계를 이루는 가주동의 도로 아래에 있는 작은 바위로 신라 말의 대학자이며 문장가인 고운 최치원선생이 낚시를 즐기던 곳 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 당시는 이곳까지 바닷물이 드나들었다고 하나 지금은 뭍으로 변해버린 곳이다.
이 바위는 2.4m×1.4m정도의 화강암 계 자연암석으로 동남부에 60cm×35cm의 각자부를 마련하여 음각으로 「청룡대 치원서」라 새겨져 있는데 최치원선생의 친필로 추정되며 그 후에 후손들에 의해서 청룡대비가 건립되어 있다.
최치원은 문성왕 7년(857년)에 태어나 12살에 당나라에 유학하였다. 18살이 되던 해 제과에 급제하여 20살 약관의 나이에 외국인에게는 파격적인 대우라 할 수 있는 선주의 율수 현위에 제수 되었으나 2년 만에 현위의 자리를 내놓고 물러갔다. 그 뒤 황소의 반란이 일어나자 관군의 총지휘를 맡은 고변의 종사관인 서기의 책임을 맡은 선생은 격황소서를 찬술하였는데 내용을 읽던 황소가 놀라서 의자에서 떨어졌다는 일화가 전해온다. 종사관으로 있을 때 찬술한 모든 글이 계원필경에 들어 있다. 이처럼 뛰어난 문장에도 불구하고 당서의 열전에 선생이 들지 못한 것은 선생의 글재주를 시기한 때문이었다고 한다. 고국을 떠난 지 17년 만에 귀국하여 시독 겸 한림학사 수병부시랑 지서서감사의 벼슬에 올랐으나, 왕이 두 번이나 바뀌고 조정에서 서로 질투하여 경륜과 포부를 펴보지 못한 채 함양 등 지방의 태수 등을 지냈다. 진성여왕 8년, 나라가 혼란하고 백성이 도탄에 허덕이자 시정의 수습책인 시무책 10여조를 올렸는데 이를 왕이 기꺼이 받아들여 아찬에 벼슬에 올랐다. 그러나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이상과 좌절을 털어 버리고 40세의 나이에 명산대해를 주유하다 가야산에 은거하였다고 한다.
우리고장에는 언제 선생이 다녀갔는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청룡대외 또 한 곳에 선생의 자취가 남아 있으니 웅천읍지의 산천조에 기록되어 전해오는 강선대가 그곳으로 선생이 배를 타고 달빛을 즐겼다고 기록되어 있다.

안골포 굴강(掘江)은 조선시대 군선의 소박처로서 선박의 수리 및 보수, 군수물자의 수송, 선박의 계류와 정박을 목적으로 축조한 시설물로 안골포 진성의 북 서편 해안에 축조되었다. 기록에 의하면 전국적으로 굴강유적이 5-6개소에 이르고 있으나 대부분 흔적만 남아 있고, 여천의 선소와 굴강이 복원되어 있다. 안골포 굴강은 상부의 석축이 일부 허물어지기는 하였으나 하부는 매몰되어 온전히 남아있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현재 매립되어 육지로 변해버린 기존도로에도 굴강이 연결되어 있거나 굴강과 관련된 유구가 매몰되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굴강의 목은 동편의 내만을 바라보고 위치하여 외만 파도를 막을 수 있도록 되어 있으며 현재 드러나 있는 궁형 석축의 길이는 75m정도이다. 안골포는 이순신장군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한산도해전 이틀 뒤 왜 수군 주력함대를 대파하여 남해안의 재해권을 완전 장악한 안골포 해전지이기도 하다. 

자은동에 있는 구산(해발116m)의 8부 능선에 자연암반의 정상부위를 중심으로 다소 서쪽으로 경사를 이루면서 비스듬히 한 바퀴 둘러서 축조한 테뫼식 석축성으로 내벽의 경우 높이가 5m가 되는 곳도 있으며 성 둘레는 350m이다.
축성에 사용된 석재는 화강암 또는 점판암 계통의 산석을 장방형으로 다듬어서 내 외벽의 축조용으로 사용하였고 중간부분은 자연석을 차곡차곡 눕혀서 채웠다. 특히 체성 밖의 기단부분에 계단식 굽도리가 가미된 것은 고구려나 신라시대의 산성 축조수법을 계승 한 것으로 보인다.
동쪽에 문지를 갖추고 문지의 바깥에는 건호가 둘러져 있다. 뿐만 아니라 체성 아래에는 인수구와 퇴수구가 구비되어 성내의 식수는 상수로를 통하여 높은 계곡의 물을 끌어들여 사용하고 나머지는 하수로를 통하여 성 밖으로 내보내도록 되어 있다. 동문지의 문루는 정면 1칸, 측면 1칸 정도의 규모로 추정되며 문지 주위에서 발견된 석조유구는 이 성곽과 관련된 건물의 온돌시설이나 봉수지일 가능성이 크다.
성 폭은 기단부가 6m, 상부가 5.5m로 내 외벽이 적심부를 향해 비스듬히 경사각을 이루며 축조되었는데 이 성지가 태능훈련원 진해훈련분원(진해선수촌) 부지로 확정되어 동아대학교박물관에 의해서 1983년 12월 20일부터 1984년 2월 17일까지 발굴조사가 이루어 졌는데 이때 출토된 유물의 연대로 미루어 6세기에 축조되어 고려 초기까지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제포(내이포)는 군사적, 경제적으로 매우 중요시 되던 남해안의 전략적 요충지이다.
고려 공양왕 2년(1390년)에 양광도와 전라도 및 경상도의 연해처에 만호를 두었는데 
 이때 내이포에도 수군 만호진이 설진되었다. 
조선 태조7년에는 경상우수영으로 승격하였고 태종과 세종 때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무역항으로 개항된 곳이다. 조선 성종 대에 이르러 수군의 선상수어가 무너지고, 제포에 성지가 없어서 만호가 먼저 사로잡힐 것이라 하여 축성이 건의 되었으나 국법에 만호는 항상 선상에서 방어하도록 되어있다는 반대 여론으로 축성이 무산되었다. 
그 후 성종15년(1485년) 사헌부 집의 조숙기의 계청으로 성종 16년 우의정 홍응을 순찰사로 삼아 경상우도와 
 전라좌도의 22개 수군영진에 축성하기로 하였는데 그해 3월에는 이미 제포에 축성이 진행되고 있었으며 
 성종17년(1486년)에 완성되었다. 
제포진성은 제덕동 안지개마을의 낮은 야산 서쪽 경사면을 이용하여 정상부로부터 능선을 따라 해안에 이르기
 까지 축조하였는데 자연대석으로 이중 기단을 조성하고 동북의 정방에 옹성형 문지를, 성벽의 요소요소에는 
 곡성을 두었을 뿐만 아니라 외부에는 일정한 간격을 두고 깊이 5m내외, 폭 5-9m 내외의 해자를 둘렀다 
 성의 총연장은 1,377m, 폭 4.5m, 높이 2m 내외의 평산성이다. 성내에는 동헌, 진교청, 진무청, 사부청, 포수청, 사령청, 군기고 등의 공해와 어변정, 회원루, 조종각, 수항루 등이 있었다. 

고려 말 잦은 왜구의 침략을 방어하고 인근 백성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축성하였으며 정상에 고산봉수대가 있다
 길이는 1,200m 높이는 4.5m이고 축성연대는 고려 말인 1384년(우왕 10년)이다. .
현동 뒷산인 해발 400m의 고산에 축조된 석성으로 현동산성 ,비봉산성, 등으로 불리는 산성으로 
 내탁법을 사용하여 성벽을 쌓았다. 또한 일부 성벽은 외벽이 밖으로 활처럼 휘어진 궁형으로 축조되었으며, 
급경사에는 단을 이루도록 축조하기도 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을 일으켜 승승장구하던 왜군은 해전에서 우리수군에게 패전을 거듭하여 막대한 군사적 타격을 입고 본국으로부터의 보급이 원활하지 못하자 우리 수군을 해상에서 방어하고 장기간 주둔을 할 수 있는 기지로 활용하기 위하여 1593년부터 남해안 연안일대의 요지에 18개소의 본성과 다수의 지성을 축성하였다.
웅천왜성은 웅천의 남산(해발 184m) 산봉우리에서 능선을 따라 산기슭까지 뻗친 석성으로 1593년 소서행장이 구축하여 수비하던 곳으로 정유재란 때 다시 증축 하였다고 한다.
웅천읍지에 따르면 원래 남산은 3개의 봉우리가 있었으나 이를 삭평한 뒤 일본식으로 산의 정상부에 본성을 두고 산록을 따라 아래로 내려가면서 점차적으로 제1외곽, 제2외곽성을 질서 있게 배치하여 축성하였다. 아울러 육지로부터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하여 남북으로 양익으로 긴 나성을 두었고 북쪽 해안과의 연락을 위한 통로와 양 측면에 외호를 조성하였다. 성의 넓이는 약 5,000평 정도이고 성벽의 높이는 지형에 따라 3-8m에 이른다. 축성에 사용된 성석은 현무암과 청석이 대부분인데 가장 큰 암석은 1.5m×1.5m×2m에 이르는 것도 있다. 대형면석을 상하로 고르게 쌓고 그 사이사이에 괴석을 채우면서 지면에서 70˚정도의 경사각을 이루어 축성하였다. 고려 말 남해안 연안일대에 산성을 축조하여 왜구가 침범하면 전략적으로 유리한 위치에서 방어하고 주민을 입보시키는 계획이 전면적으로 시행되었다. 따라서 웅천왜성의 기단부에 조선 성의 흔적이 있다는 보고와 관련하여 보다 정밀한 조사가 필요하다.

임진왜란때 안골리 뒤산(표고100m)에 왜수군이 쌓은 석성  
 
안골왜성은 임진왜란 때 왜 수군에 의해 축성된 성으로 협판안치, 가등가명, 구귀가륭 등 왜 수군사령관이 1년씩 교대로 수비한 왜 수군의 본거지였다.
안골왜성은 동망산(해발 100m)의 지형을 3등분으로 나누어 부분적으로 정상부를 삭평한 뒤 본성, 제1외곽, 제2외곽을 나누어서 따로 석축하고 외곽으로 각 부분을 연결하였는데 외곽의 일부는 토성이다. 성의 남쪽과 서쪽은 만을 끼고 있어서 해로를 이용하기 쉽도록 해변까지 굴호를 조성하여 교통호로 이용하였다. 성 둘레는 594m, 높이는 4-7m 정도이며 성의 면적은 약 5.000평 정도이다. 일제강점기 때에는 국가사적으로 지정되었으나(1938년) 광복 후 문화재에서 제외 되었다가 현재는 문화재 자료로 지정되어 있다. 

화면의 상단에는 범. 제석천과 위태천을 배치하였고 하단에는 일월천자와 팔부상, 천동과 천녀 등을 배치한 군집군도로 상단의 도상이 하단에 비해 부각되어 있다.
범. 제석천은 정면을 향해 서 있고 그 우측에는 금강저를 지니고 합장한 모습의 위태천이 범, 제석천 쪽으로 약간 튼 채로 서 있다. 범, 제석천은 녹색의 원형 두광을 각각 구비하고 있으나 단색 신광은 2위 일체형으로 처리하고 있다. 범천은 왼손바닥으로 연꽂 가지를 받쳐 들고 오른손은 가지를 살짝 잡고 있다. 반면 제석천은 합장한 모습이다. 그리고 화면의 배면에 부착되었던 초본도 함께 전해지고 있는데 초본의 경우 먹선으로 도상의 윤곽들을 뚜렷하게 제시하고 있다. 규격은 완본과 거의 유사하며 짙은 황색과 옅은 황색, 그리고 백색으로 채색되어 있다. 본 작품은 상태가 양호하고 도상들의 섬세한 표현기법이 돋보이는 작품으로 초본이 함께 전하고 있어 더욱 중요한 자료적 가치를 지닌다. 정확한 조성연대를 알 수는 없으나 정암사 아미타극락회상도의 표현기법과 초본의 상태를 보아 같은 공방에서 동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 된다.

이 불화는 묵서화기에 의해 1905년 범어사 청련암에서 금어 대인에 의해 제작되어 성주사에 봉안되었다가 진해포교당이 신축되면서 정암사 대웅전에 봉안되었다.
화면의 중앙에 아미타여래가 결가부좌하였고 좌우로 유희자를 취한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앉아 있으며 아미타여래의 두광 좌우로 아난과 가섭, 그리고 2위의 나한상이 서 있다. 그리고 화면의 상단 좌우측에 6위의 보살이 3위씩 구름을 타고 내영하고 있다.
중앙의 아미타여래는 왼손은 1지와 3지를 맞대어 복부 앞에 놓고 오른손은 손가락을 편 채 오른쪽 무릎 위에 가지런히 올려놓은 자세를 취하였고 연화자 위에 앉아 있다. 원형의 두광과 신광을 표현하였고 두광의 윗부분에서 방광이 포물선을 그리며 좌우로 뻗어가고 있다. 어깨가 넓고 무릎 너비가 알맞아 신체가 균형적이고 육신색은 백색을 바르고 그 위에 주색을 약간 발라 표현하였으며 육신선은 먹선 위에 옅은 주색선을 그었다.
본 작품은 근대작품이기는 하나 구도가 안정적이고 제작시기, 제작자, 원래의 봉안처를 알 수 있을 뿐 아니라 초본이 함께 전해지고 있어 더욱 작품성이 인정 된다.

우리나라의 국권을 찬탈한 일제는 1910년부터 1922년까지 현동일대에 군항을 건설하면서 중평 들판의 비옥한 토지를 강압적으로 매수하여 주민들을 경화동으로 강제 이주시키고 수확을 눈앞에 둔 곡식을 그대로 묻어서 중원광장과 신도시를 조성하였다. 중원광장에는 일본해군기를 상징하는 8방향의 방사상도로를 설계하고 각 구역에 8개국의 독특한 건물을 배치 할 계획이었으나 군항건설계획이 축소되어 제대로 실행되지 못하고 러시아식 건축양식으로 지은 진해우체국 창구동 청사만 건축되어 남아 있다.
진해우체국 건물은 대지 631평에 건평 136.7평의 단층 목조건물로 1912년 10월 25일 준공하여 그해 11월 15일 진해우편국이 이전하여 청사로 이용되었다. 
삼각형 대지의 꼭지점에 해당되는 지점을 출입구로 하고 있어 정문 쪽은 좁으나 건물 안으로 들어서면 점차 넓어지는 구조로 되어 있다.
목조건물로, 지붕은 동판으로 덮고 사방에 동재로 난간을 둘렀으며 반원형 채광창을 설치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말기 일제가 무기를 생산할 재료가 부족하여 지붕의 동판과 난간을 모두 징발하고 아연판으로 대체하였으나 1984년에 복원하면서 본래대로 동판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원래 목재 마루틀 위에 널마루가 깔렸던 바닥도 노후된 널마루를 들어내고 시멘트 모르타르 마감으로 개조하였다.
건물의 양식은 러시아풍의 절충식 근대건축인데 정면 입구의 양측에 세운 강한 배흘림이 있는 투스칸오더(tuscan order)의 두리기둥이 외관을 당당하게 보이게 한다.

1978년 3월2일 문동일씨가 통영시 산양면 미남리 달아마을에서 50m정도 떨어진 해저에서 발견하여 매장문화재로 신고, 1978년 10월 26일 국고에 귀속된 후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완구(碗口)는 지금의 박격포와 같은 화포로 조선시대 초기인 세종 때는 총통완구뿐이었으나 중기에 접어들면서 대완구 중완구 소완구 소소완구 등으로 발전되었으며 돌로 만든 단석이나 비격진천뢰를 발사하였다.
중완구의 구조는 둥근 돌이나 비격진천뢰를 올려놓을 수 있는 그릇인 완(碗), 화약이 폭발할 때 생겨나는 폭발력을 최대로 완에 있는 발사물에 전달해 주는 나무를 박은 격목통, 화약을 재워놓은 약통의 세부분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격목통은 완과 약통의 중간에 위치하며 약통에는 점화선을 끼우는 구멍이 2개가 있다. 
화포식언&#62775;에는 중완구는 화약 13냥이 필요하고 격목이 4치이며 단석을 올려놓는데 무게는 34근 사정거리 500보라 기록되어 있다 (듕완구애&#57989; 듕약션이 반오리오, 화약이 열석냥이오 격목이 네치니 단셕을 노흐라 돌므긔 셜흔너근이니 오&#58954;보&#58480; 가&#57987;니라)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의 중완구는 1978년 3월 2일 통영의 어부 문동일씨가 통영시 산양면 미남리 달아 마을 앞바다에서 고기잡이를 하던 중 발견하여 매장 문화재로 신고, 1978년 10월 26일 국고에 귀속된 후 해군 사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청동으로 만들어졌으나 오랫동안 바다 밑에 있었기 때문인지 부식이 심하여 명문을 판독할 수 없다. 그러나 국립진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중완구(보물 제858호)와 형태나 크기가 같은 점으로 미루어 1575년(선조 8년)부터 1605년(선조 38년) 사이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해저에서 인양되어 임진왜란 때 우리 수군이 사용하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고 이승만대통령의 별장은 원래 일본군통신대가 사용하던 건물이었는데, 주위 현동반도의 풍광이 너무 아름다워 1945년 10월 5일 대한민국 해군에서 인수하여 개조한 후 이승만대통령 별장으로 사용하였다. 그러나 이대통령 하야 후 오랫동안 방치되었다가 1979년 박정희대통령의 지시로 보수공사를 실시하게 되었다.
별장은 대지 302평에 건평 66평으로 한옥과 양옥을 절충한「ㄱ」자형인데 내부에는 집무실을 겸한 응접실, 침실, 경호실, 회의실, 부속실 등이 있다.
또한 별장에서 서쪽으로 약 50m지점 해안 절벽 위에 3평 규모의 목조가구식 구조에 갈대로 지붕을 덮은 육각정이 세워져 있으며 별장 아래 해안에는 이승만대통령이 별장에서 지낼 때 낚시를 하던 전용 낚시터와 부두가 있다. 
1949년 8월 8일, 이승만대통령과 장개석 자유중국 총통이 이곳 육각정에서 신익희국회의장, 하지군정장관이 동석한 가운데 회담을 한 후 필리핀 퀴리노 대통령에게 태평양동맹 결성을 위한 예비회담 개최를 제의한 곳으로 현대사적인 측면에서의 역사적 의미가 크게 부여되어 별장 건물과 함께 경상남도 문화재로 지정되었다.